솔직히 저는 전주한옥마을을 그냥 '관광지용으로 꾸며놓은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주나 안동처럼 정비는 잘 됐겠지만 어딘가 박제된 느낌이 날 거라고 지레짐작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제 편견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바로 알았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은 꾸며진 세트장이 아니라, 지금도 숨 쉬는 마을이었습니다.

경기전·전동성당·학인당, 문화유적이 이렇게 촘촘해도 되나요?
전주한옥마을을 처음 걷다 보면 '이게 다 한 마을 안에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문화유적이 밀집해 있습니다. 실제로 걸어보니 경기전에서 전동성당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경기전(慶基殿)은 사적 제339호로, 태종 10년인 1410년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입니다. 여기서 어진이란 왕의 초상화를 뜻하는데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가적 유물입니다. 전국 여섯 군데에 태조 어진이 봉안됐지만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건 전주의 것뿐입니다. 국보 제317호로 지정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경기전 바로 옆에는 전동성당이 있습니다. 1908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사적 제288호이며, 서울 명동성당·대구 계산성당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성당 중 하나로 꼽힙니다.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style)이란 반원형 아치와 두꺼운 벽체를 특징으로 하는 중세 유럽 건축 양식인데 이걸 19세기 말 조선 땅 전주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성당을 지을 때 무너진 풍남문 성벽의 돌을 주춧돌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 다시 보니 성당이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학인당은 1908년에 완공된 조선 말 전통 건축물로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8호입니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촬영지로 유명해졌지만 제 눈에는 무려 4,280명의 인원이 2년 8개월을 투입해 지었다는 사실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도 5대 종손 부부가 직접 전통문화체험시설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이 공간을 살아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 경기전: 사적 제339호, 태조 어진 봉안, 국보 제317호 어진 현존
- 전동성당: 사적 제288호,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지 위에 건립, 로마네스크 양식
- 학인당: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8호, 미스터션샤인 촬영지, 현재도 체험시설 운영 중
- 오목대: 지방기념물 제16호, 이성계의 황산대첩 승전 기념지, 한옥마을 전경 조망 포인트

전주비빔밥 말고 뭘 먹었냐고요? 솔직하게 털어놓겠습니다
전주 하면 비빔밥, 비빔밥 하면 전주라는 공식은 이미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처음 방문했을 때 비빔밥보다 다른 것들에 더 놀랐습니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켰더니 상 위가 가득 찼습니다. 처음엔 서비스인 줄 알았는데, 이게 전주 막걸리 문화의 정석이었습니다.
전주비빔밥의 특징은 사골 육수로 밥을 짓고, 뜸을 들일 때 콩나물을 넣는다는 점입니다. 황포묵, 육회 포함 30가지가 넘는 재료가 들어가는데, 이 구성이 단순히 맛을 위한 게 아니라 전통 한식의 오방색(五方色) 개념, 즉 청·적·황·백·흑의 다섯 색으로 음식의 조화를 표현하는 방식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먹으니 밥 한 그릇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제가 예상 밖으로 빠져든 음식은 콩나물국밥이었습니다. 뜨끈한 콩나물국밥과 함께 먹으면 전날 무슨 일이 있었든 위가 먼저 용서를 구하는 느낌이 납니다. 그 외에도 수제초코파이, 개성주악(조선시대 궁중 떡의 일종으로 찹쌀 반죽을 기름에 지져 꿀을 입힌 과자), 물갈비 등 골목마다 특색 있는 간식이 줄지어 있습니다.
낮보다 밤이 더 예쁜 마을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야경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네온사인도 없고, 빌딩 불빛도 없는 한옥마을에서 야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저녁 7시쯤 경기전 돌담길을 다시 걸었을 때, 제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한옥마을의 야경은 화려함이 아니라 절제에서 나옵니다. 태조로를 따라 설치된 천사초롱 조명이 기왓장 곡선을 따라 은은하게 빛나고, 경기전 담장에 낮게 깔린 조명이 돌 하나하나의 질감을 살려줍니다. 팔작지붕(八作지붕)이란 지붕의 네 귀가 살짝 하늘을 향해 들린 구조인데 이 독특한 처마 곡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받으면 낮과는 전혀 다른 실루엣을 만들어냅니다.
야경을 즐긴 뒤 오목대 둘레길을 올라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가파르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옥마을 전경은 낮과 또 다른 분위기입니다. 기왓장이 오밀조밀하게 이어진 모습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장면은 제가 여행하면서 본 야경 중 손에 꼽히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은 2010년 국제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됐습니다. 슬로시티란 빠른 속도와 획일화에 저항하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자연환경을 지키며 느리게 살아가는 도시를 인증하는 국제 네트워크 제도입니다. 밤의 한옥마을을 걸으면서 이 인증이 왜 붙었는지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빠르게 둘러봐야 할 관광지가 아니라,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마을이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을 다녀온 뒤 제가 느낀 건 하나입니다. 이 마을은 박물관이 아닙니다. 1910년부터 형성된 도시형 한옥(都市型 韓屋), 즉 전통 한옥 구조를 도심 생활에 맞게 변형한 주거 형태가 실제 삶과 함께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곳입니다. 그 위에 경기전 같은 국보급 문화유적과 전동성당 같은 근대 건축물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어 걷는 것만으로 시간의 층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 대표 관광명소로 선정했고 론리플래닛이 아시아 10대 명소 3위로 꼽은 이유가 직접 와보니 납득됐습니다. 처음 방문이라면 낮에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저녁 먹거리 골목을 거닌 뒤 야경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서를 추천합니다.